안나 일기

02_내가 세운 세계관 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감, 그것이 곧 한계다.

Apie 2024. 2. 5. 11:17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 당신이 아는 것, 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 당신이 세운 세계관 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감, 그런 것들이 곧 당신의 한계입니다._ From. 모든 삶은 빛난다.

 

직장에서 지원해주는 정신상담기관이 세 군데가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 A기관에 연락을 취했고 상담사를 배정받았다.

상담받으러 가는 날, '내가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간다니.' 라는 문장만이 내 온 몸에 가득했다. 날이 무척이나 맑아서 버스타고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길의 발걸음은 오히려 산뜻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안 느껴졌던 것도 같다. 마음도 몸도 붕 떠서 도착한 상담실은 닭장같이 다닥다닥 문이 이어져 있는 둥글고 긴 복도 중간 쯤 위치해 있었다.

평소 친구가 답답해할 정도로 나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내가 좋지도 않은 일을 생판 모르는 누군가에게 떠들어야 한다니 라는 생각을 복도를 걸으며 했다. 하지만 나는 치료를 위해 일까지 멈추고 여기에 왔고, 불필요한 시간낭비는 하기 싫었다. 상담사의 눈빛은 낮설었고, 상담사의 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게 느껴졌다.

있었던 일들, 생겨난 부정적 증상들을 떠오르는 대로 막 내뱉었다.나도 모르겠는 요즈음의 내 상태가 정리가 하나도 안되어있었기에 앞, 뒤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생각나는 것 들을 막 내뱉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상담을 받고서 나왔는데 울음이 또 목구멍을 쳤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것인지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상태가 도저히 소화가 되지 않았다. 맑은 날의 햇살에 비친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버스를 타기 전 한 카페에 들렀다. 평소 내가 읽기 힘든 마음이 차오를 때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환기를 시켰었기에 조금은 엉망이 된 기분이 나아지길 바랐다. 챙겨간 책도 없었고, 아이패드도 없었다. 그냥 멍하니 커피를 마시며 알바생을 구경하고,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아무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주변을 보고 있는 행위를 인식하고 있는데, 인식되지 않는 느낌,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설명하지 못 할 느낌. 

상담사는 잠 못들고 계속 깨어나는 것에 대해 수분섭취가 많아서 소변문제로 그런 것 일 수 있다며, 자기 전 물을 금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의욕적이고 계획에 매여있던 내가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다 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부분에서는, 지금까지의 루틴들이 지루해졌을 수 있다며 다른 흥미꺼리를 찾을 것을 권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서 치료받으려고 마음먹은거라고? 이게 맞아? 선택에 따른 회의감 또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이 들었다. 스스로 타파를 해야하는데 순간 누군가에게 기대를 하고 의지를 하려고 했구나라는 생각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주체는 나 여야만 한다. 상담은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이다. 나에게 맞는 도구를 찾으면 되지. 

그렇게 집에 돌아와 두 번째 B기관에 연락을 취했고, 그 후에 무얼 했었는지는 아무 기억이 없다. 

그  와중에도 내 세계에는 끊임없이 작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고, 나의 작은 모래성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다.